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남미 4개국 순방이 오늘로 마무리된다.
당초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은 축구광인 시진핑이 월드컵 결승전을 관람할 수 있도록
브라질에서 열리는 제6차 브릭스(BRICs) 정상회의를 월드컵 직후로 잡았다.
그러나 시진핑은 그런 호사(豪奢)를 마다했다.
대신 일에 집중했다.
브릭스 정상회의에선 브릭스판 세계은행인 신개발은행을 창설하기로 합의해
미국 주도의 금융질서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냈다.
또 70억 달러(약 7조1800억원)를 빌려준 브라질에선 철광석을,
80억 달러의 아르헨티나에선 콩을,
130억 달러를 꿔준 베네수엘라에선 석유를 공급받는 관계를 더욱 다졌다.
특히 부도 위기의 아르헨티나엔 75억 달러 차관 지원이라는 통 큰 선물을 안겼다.
그리고 좋은 친구(好朋友), 좋은 동지(好同志), 좋은 형제(好兄弟) 등 3호(三好) 관계로 부르는 쿠바로 날아가
이제 지구상에서 몇 남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 간의 우의를 과시했다.
그야말로 8박9일간 미국의 텃밭으로 여겨지던 남미에서 마음껏 뛰논 셈이다.
그러나 술에 취한 노인의 뜻이 술에 있지 않듯(醉翁之意不在酒)
시진핑이 정작 겨냥한 건 남미 순방국이 아닌 미국이다.
지난 2014년 4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아시아 4개국 순방에 대한 대응적 성격이 강하다.
당시 오바마는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중·일 영유권 분쟁을 빚고 있는 센카쿠 열도(尖閣·중국명 釣魚島)가 미·일 안보조약의 적용 대상이라고 말해 중국을 격분시켰다.
남미는 전통적으로 미국의 뒤뜰로 인식돼 왔다.
저간에 먼로주의(Monroe Doctrine)가 깔려 있다.
1823년 당시 미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는 남미에 대한 유럽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먼로주의를 선포했다.
처음엔 남미 각국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유럽이 빠진 자리를 미국이 대신하면서 먼로주의는 변질됐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미주(美洲)에서 국제경찰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남미의 정치와 경제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며 먼로주의는 미국 패권주의의 대명사가 돼버렸다.
하지만 패권주의는 언제나 저항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휘청거리는 남미 경제에 처방전으로 내려졌던 신자유주의 개혁의 실패,
남미에 잇따라 등장한 좌파 정권, 9·11 사태 이후 반테러에 집중하느라 남미를 소홀히 한
조지 W 부시 정권, 2008년 가을 뉴욕발 금융위기 이후 현저하게 약해진 미 경제력 등의 여러 요인이 맞물리며 남미에선 반미(反美)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점을 찍은 건 2011년 말 성립된 ‘라틴아메리카-카리브해 국가공동체(CELAC)’ 성립이다. 워싱턴을 뺀 미주 조직으로 남미 국가들이 힘을 합쳐 정치와 경제 안보를 지키려는 목적에서 출범했다.
그 타깃이 미국임은 물론이다.
이로써 먼로주의는 사실상 와해됐다.
지난 2013년 11월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의
‘먼로주의 시대는 끝났다(The era of Monroe Doctrine is over)’는 선언은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다.
한데 미국 먼로주의의 종말과는 반대로 지구 반대편에선 새로운 먼로주의가 등장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판 먼로주의다.
2012년께부터 미국에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중국이 미국에 상호 핵심이익을 존중할 것을 골자로 하는 신형대국관계 건설을 제안하던 시점과 겹친다.
미국은 먼로주의를 제시할 때 미국의 핵심 국가이익인 남미를 지키기 위해 언제든 전투를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중국도 자신의 핵심이익이 침해받으면 무력 동원도 불사하겠다고 말한다.
중국의 핵심이익엔 남중국해나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 문제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중국판 먼로주의란 말은 지난 2014년 5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아시아 상호협력 및 신뢰구축 정상회의(CICA)’ 이후 다시 떠올랐다.
시진핑이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를 주장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과거 남미 국가들에 ‘미주인에 의한 미주’를 말하며 먼로주의를 폈던 것의 판박이다.
미국이 남미에서의 유럽 배제를 노리고 미주인에 의한 미주를 외친 것과 같이
중국은 현재 아시아에서의 미국 영향력 제거를 위해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를 주장하고 있다는 분석이 미국에서 나온다.
중국의 심기가 편할 리 없다.
중국은 반격한다.
자신의 역사 경험에 비춰 남도 그럴 것이라고 재단하는 것은
소인의 속내로 군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以小人之心度君子之腹)과 같다고 비꼰다.
또 관리는 불을 낼 수도 있지만 백성은 등불 켜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가
(只許州官放火 不許百姓點燈)라고 반문한다.
나쁜 짓을 일삼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 정당한 권리를 누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꼬집은 말이다.
그러면서 중국은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을 것(永不稱覇)이라고 말한다.
현재 미국은 중국의 의도를 의심하고 중국은 미국의 의심이 기우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형국이다.
어느 쪽이 맞는가는 역사가 가름해줄 것이다.
한 가지 중국이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변질된 먼로주의는 결국 남미 국가들에 의해 반미라는 역풍을 맞았다는 점이다.
중국이 지금 말하는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 주장이 초심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앙일보] 2014.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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