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6일 월요일

[아침안개 군사논평] THAAD의 한반도 배치에 대해 중국은 말할 권리가 없다.

근래 국방분야의 화두는 THAAD의 한반도 배치에 관한 문제이다.

리퍼트 주한미국대사의 피습사건 이후
일부 정치인이 과도한 행보를 보인 후 이 문제는 여야 간의 정쟁수단으로까지 취급되고 있다.

여기에 2015년 3월 16일 방한 중인 류젠차오(劉建超) 중국 외교부 부장조리(차관보급)가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이경수 외교부 차관보와 업무 협의 시
"THAAD 문제와 관련한 중국측의 관심과 우려를 중요시 해달라"라며
대한민국을 압박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서 알려졌다.

본인은 THAAD의 한반도 배치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논하고 싶지 않다.
다만, 중국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정부의 대응이 문제가 있음를 지적하고 싶다.

1. 중국이 THAAD의 한반도 배치를 반대하는 이유
중국이 THAAD의 한반도 배치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의 군사적 이익 때문이다.

THAAD의 구성체계는
트럭에 탑재되는 미사일 발사대와 요격용 미사일,
항공 수송이 가능한 탐지레이더(AN/TPT-2),
커뮤니케이션 및 데이터관리 역할을 하는 화력통제 시스템 등 4개 부품으로 구성된다.

이 중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은 탐지레이더 AN/TPT-2의 성능 때문이다.

AN/TPT-2 레이다가 한반도에 배치되면 중국의 미사일전력이 약화된다.
중국이 전략군으로 운용하는 제2포병 전력이 약화되어
실질적으로 동북아시아와 서부태평양에서 중국의 세력이 축소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대한민국에 THAAD가 배치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의 이익은
미국과 아시아태평양에서 경쟁을 하는 현 시점에
미국의 해양전력을 견제하는 중국의 DF-21과 같은 전략미사일이
AN/TPT-2 레이다로 인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2. 중국이 THAAD의 한반도 배치 반대가 말이 않되는 이유

2-1) 중국의 THAAD문제에 원죄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THAAD를 도입하기로 최종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에서 THAAD의 도입을 주장하는 이유는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와 장거리탄도미사일에 대한 대응수단으로 획득을 주장한다.

중국이 지난 수 십년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음양으로 지원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강력하게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여 지금 북한에 핵무기가 없다면,
대한민국에 THAAD를 배치할 이유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이 북한을 감싸안고 지켜온 지난 수 십 년 간의 정치적 행위의 결과가
현재 대한민국에 일고 있는 THAAD 배치의 논란인 것이다.

이는 이 문제에 대해 중국이 원죄(源罪)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1) 6.25 전쟁에 중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현재 북한정권과 북한 핵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2) 북한의 1970년 대 핵무기 개발을 처음으로 시작할 싯점에 중국의 서북공업대학에서
   일부 기술을 북한에 제공했다.
3) 이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국제문제로 비화되었을 때 UN에서 중국은 북한을 비호했다.
4) 중국이 주도한 6자회담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시간 만 벌어주었다.
5)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동안 중국은 북한에 대한 강력한 제재는 커녕,
   지속적인 경제원조를 해왔다.
6) 그리고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했다.

대한민국이 북한의 핵무기에 대응하여 안보를 강화하겠다는데,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도록 방임한 중국이
이제와서 자국의 이익 만을 고려하여 반대한다는 것은
대한민국과 전략적동반자 관계를 가진 국가로서 취할 행동이 아니다.

중국이 대한민국에 THAAD가 배치되는 것을 반대한다면,
중국은 반대급부로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북한의 핵무기는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THAAD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도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결정이 중국의 이익에 반(反) 한다면,
중국은 대한민국을 압박할 것이 아니라, 적절한 반대급부를 제시해야 한다.
중국의 이익은 대한민국의 손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상이다.
그 반대급부는 물론 북한 핵무기의 원천적 제거 방법이다.

중국이 북한 핵무기를 원천적으로 제거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대한민국이 북한 핵무기에 대응하기 위해
어떠한 무기체계를 획득하든지 중국이 관여할 권리가 없다.

2-2) 대한민국의 전략적 모호성의 문제.

대한민국 정부가 취하고 있는 3 NO라는 전략적 모호성은
중국과의 경제문제를 지나치게 우려한 미봉책이다.

현재 북한 핵무기에 대응하기 위해 추진하는 KAMD Killchain의 기획 초기단계부터
중국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고고도요격체계'를 제외하고 '종말단계요격체계' 만을 구축한다는
반쪽짜리 국방정책을 수립한 것이 화근이다.

KAMD Killchain 초기부터 '고고도요격체계'의 확보를 계획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는 국가의 존망과 국민의 생명에 치명적인 대량살상무기이다.
이런 대량살상무기에 대응하는 국방정책을 수립하면서
중국과의 경제문제를 고려했다는 것은
국방문제를 정치적으로 결정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만약 중국과 경제문제 발생한다면 대한민국은 괴로워 질 것이다.
경제가 위축되고 삶이 팍팍해져 생활이 궁핍해 질 수 있다.
그래도 대다수 국민이 죽지는 않는다.

만약 북한의 핵무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수 십 만의 국민 죽을 수 있다.

중국과 경제문제가 발생하여
대한민국 경제가 어려워지면 선거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 정치인이 개입하여
'고고도요격체계'를 제외하고 '종말단계요격체계' 만을 구축하는
현재의 KAMD Killchain을 확정했다.

그리고 중국과 미국의 눈치를 보며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단어로 실수를 포장하고 있다.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생명이 걸린 문제에 '모호성'이라는 단어가 과연 적합할까?

'모호성'이라는 단어보다 '확고성'이 국가안보에 더 적합한 것이 아닐까?

3. 향후 대응방안.

1) KAMD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정치논리를 제외하고 군사적 필요성 만으로 신중하게 재검토해야 한다.

재검토 후 '고고도요격체계'가 필요하면 도입하면 되는 것이고
불필요하다면 도입하지 않으면 된다.


2) 중국의 압력에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

중국이 대한민국을 압박하는 수단은 경제문제이다.
중국의 요구를 대한민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중국이 쓸수있는 수단은 대한민국에 대한 경제제재가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물론 이러한 중국의 행동은 대한민국 경제에는 치명적일 것이다.

그러나 경제가 어려워 진다고 절대 다수 국민이 죽지는 않는다.
국민의 경제 생활이 잠시 어려워 질 뿐이다.
그리고 어려워진 경제는 회복할 방법이 있다.

우리가 받는 경제적 피해가 클 수록 중국도 손해를 본다.
이런 문제로 중국이 대한민국을 압박한다면 중국의 대외신인도에도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중국도 말처럼 쉽게 우리를 압박할 수는 없다.

현 정권이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중국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할 필요는 없다.

이 문제는 재삼 말하지 만 국가의 존망과 국민의 생명과 관계된 문제이다.

더군다나 중국은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낸 원죄(源罪)가 있다.
결자해지(結者解之),
중국이 북한 핵무기 문제를 해결한다면,
우리도 THAAD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배짱이 필요하다.

중국 스스로 
'중국의 이익'을 주장한다면,
이점은 역으로 
'중국의 요구사항을 대한민국이 수용하지 않으면 중국이 손해'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이익과 손해가 우리의 결정에 달린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우리의 이익을 보전할 수 있는 논리이다.

[아침안개] 2015.3.16.

2015년 3월 10일 화요일

U.S. Should Be Appalled by Japan's Historical Revisionism - If Imperial Japan was the victim in WWII, than Harry Truman, not Hideki Tojo, must be the war criminal.

U.S. Should Be Appalled by Japan's Historical Revisionism

If Imperial Japan was the victim in WWII, than Harry Truman, not Hideki Tojo, must be the war criminal.

In a late January address to Parliament, Japanese Prime Minister Shinzo Abe directly entered the fray in Tokyo’s accelerated attempts to rewrite World War II history.

As the New York Times reported at the time, in the speech Mr. Abe vowed
“to step up efforts to fight what he called mistaken views abroad concerning Japan’s wartime actions.”

The prime minister was referring specifically to references to Comfort Women in a McGraw Hill-published textbook used in some California high schools.

However, while Japan’s historic revisionism may begin with the Comfort Women and the Nanking Massacre,
it ends with President Truman and the atomic bomb.

If Japan is the victim in the Pacific War,
Tokyo would have it, then America must be the aggressor and Harry Truman, not Hideki Tojo, the war criminal.

Those who argue that the United States should have little interest in the current debate raging over the historic legacy of the Second World War in Asia need to think again.

First and foremost, the Pacific War, which ended 70 years ago this coming summer, was very much America’s war too.

While the Second World War had raging in both Asia and Europe for years,
it began for the United States on December 7, 1941 when Japan attacked Pearl Harbor.

Following the surprise attack, America declared war on Imperial Japan, NOT Nazi Germany or Fascist Italy.

The recent movie “Unbroken” is a chilling reminder of what that declaration of war meant for America’s Greatest Generation.

Tokyo’s revisionist logic is centered on the premise of Japan being victimized by the Allied powers,
most notably in the fire bombings of Tokyo and the devastating atomic bombings of the of Hiroshima and Nagasaki,
which resulted in thousands of civilian casualties.

This revisionist narrative is laid out in detail at the Yushukan museum in Tokyo next to the Yasukuni war shrine.

The logic is as follows: Imperial Japan waged the Great East Asia War (Daitowa Senso) in an effort to liberate the Asian peoples from the yoke of Western Imperialism.

The “selfless goal” was to bring the enlightened modernization of Meiji Japan to hopelessly backward Asian brothers and sisters.

The Yushukan museum claims that U.S. President Franklin Roosevelt sought to halt this crusade of “Asia for Asians” by imposing an oil embargo that aimed to cripple Tokyo’s war-making capacity.

According to the narrative, then, Japan had no choice but to respond to Roosevelt’s interference by attacking the U.S. Pacific fleet at Pearl Harbor.

The unprovoked attack on Pearl Harbor was the greatest such attack on American soil before 9/11.
Notably, the Pearl Harbor attack also had civilian casualties, including a seven month-old infant.

(Recommended: Five Ways Japan Could Have Won World War II)

In truth, Pearl Harbor likely had more to do with Japan signing the Tripartite Pact with Nazi Germany and Fascist Italy in Berlin on September 27, 1940 than with FDR’s oil embargo.

Even the bravado of Japanese militarists would likely have been tempered by the sobering thought of taking on the industrial might of the United States all alone.

When the decision to attack Pearl Harbor was reached in the fall of 1941, Nazi troops were engaged in a full-scale invasion of the Soviet Union.

It looked as though the Allies would be preoccupied with stopping the Nazi blitzkrieg, leaving Tokyo a free hand in Asia.

Hitler’s troops reached the outskirts of Moscow before a Soviet counterattack on December 5, 1941 – a mere forty-eight hours before Pearl Harbor.

As Japanese bombs fell in the Pacific, the Red Army and a ferocious Russian winter combined to begin to turn the tide against Hitler in Europe.

Still, Hitler and Mussolini, foolishly in retrospect, honored their treaty commitment to Tokyo by declaring war on the United States in response to Congress declaring war on Japan.

Unlike in Europe, history revisionists in Tokyo are not limited to isolated neo-Nazis and skinheads.

Rather they include respected figures in Japanese society, including politicians and journalists.

The crimes committed during the Pacific War which these Japanese opinion leaders now deny are critical to the judgment of history.

While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the victims in the Nanking massacre, the Sook Ching massacre in Singapore, the sacking of Manila, Tokyo’s slave labor system,
Unit 731’s bio-chemical experiments in Manchuria, and the Comfort Women stations,
were Asians, rather than Americans or Europeans,
these atrocities join other Axis war crimes and crimes against humanity as a major rationale for post-war international tribunals, including Nuremberg.

(The torture of POW slave laborers, as chronicled in “Unbroken,” along with the Bataan Death March and Siam-Burma Railway laborer abuse, was directed primarily against Caucasians and African-Americans.

One sobering statistic: “Overall, an estimated 40 percent of U.S. Army and Air Force POWs died while in Japanese captivity, compared to 1.2 percent in German and Italian custody.”

The bushido militarist culture in Imperial Japan preached that any soldier who surrendered rather than dying in battle was below contempt.)

The continued validation of crimes committed by Imperial Japan during the war,
thus, remains essential if the Allied narrative of repelling a war of aggression is to prevail.

The structure of the United Nations itself, whose five permanent Security Council members are WWII’s victorious powers, is premised upon this.

Remaining silent in the face of Japanese denials of Comfort Women or the Nanking Massacre could ultimately undermine the whole rationale for the post-war international system.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IMTFE) was convened in Tokyo to try Japanese leaders— including Hideki Tojo, architect of the Pearl Harbor attack— as war criminals.

The IMTFE, however, is widely dismissed in Japan as “victor’s justice.” Many argue that those who were tried were only performing their patriotic duty to the Emperor,
whose role in the war was never officially examined.

Many also contend that the Allies sitting in judgment had committed far greater war crimes on a helpless Japan, including, as noted previously,
the firebombing of Tokyo and the dropping of the atom bombs.

In his excellent book, Wages of Guilt:
Memories of War in Germany and Japan, Ian Buruma points out that when the United Nations convened a Conference on Disarmament in Hiroshima in July 1992, “all went well” until an American Harvard professor spoke.

Buruma records how the professor presented the Greatest Generation’s explanation for the atomic bombing by stating that “it ended World War II and saved a million Japanese lives.”

Buruma records that the professor’s statements caused “outrage” among the Japanese public and that the Asahi Shimbun opined that unless the United States “disentangled itself from this kind of view” it would face opposition from non-nuclear countries.

Yet without this explanation, the use of atomic bombs on two cities filled with civilians is horrific and unjustifiable.

War correspondent John Hersey’s compelling book Hiroshima, written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the attack, with its graphic description of melted eyeballs and the shadow of a vaporized victim burned into a tile wall, would stir any person’s conscience.

Japanese people cannot be criticized for reacting with horror, especially since their textbooks and educational system reportedly gloss over the war crimes Imperial Japan committed before the atomic bombings.

If the Nanking Massacre “never happened,” as NHK (Japan Broadcasting Corporation) Governor Naoki Hyakuta declared in February of last year,
then there is no problem with going to Yasukuni Shrine to honor the spirit tablet of General Iwane Matsui, who commanded the Shanghai Expeditionary Force (SEF) in the assault on Nanking in 1937-38 and was sentenced to death by the IMTFE.

However, if, as documented by the IMTFE, at least 200,000 Chinese soldiers and civilians were killed in the massacre,
then honoring the memory of Matsui is the equivalent of honoring Adolf Eichmann,
who was convicted of murdering 437,000 Hungarian Jews.

Both the Obama administration and Congress should be concerned that, by losing control of the World War II historic narrative,
they could pave the way to the ultimate determination that President Harry S. Truman was the real war criminal in WWII.

Without the crimes against peace chronicled by the IMTFE, there is little moral justification for the atomic bombings beyond the “they saved lives” narrative (which is largely dismissed in Japan).

One reportedly popular narrative in Japan is that Harry Truman and his advisors were white racists determined to use the ultimate weapon on an Asian people to demonstrate to the Soviet Union the horror of a nuclear holocaust.

(This ignores the fact that the bomb was developed to be used against the Nazis,
 who were busy trying to perfect their own atomic weapon.
 The plan changed when Nazi Germany surrendered and Imperial Japan kept fighting.)

Those who advocate expressing remorse for the 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 such as Nancy Pelosi— who placed flowers at the Hiroshima bombing site when she was House Speaker in 2008— should be aware that such gestures will be misrepresented by the revisionist right in Japan to paint Truman as a war criminal.

And such gestures, without some reciprocal official gesture of remorse from Tokyo over the attack on Pearl Harbor, would not only undermine American prestige in Asian countries victimized by Imperial Japan, but would also jeopardize the whole Allied justification for the war.

Furthermore, such a one-way American apology would disturb the spirits of the 1,102 sailors and marines enshrined forever in a watery grave in the hull of the USS Arizona at the bottom of Pearl Harbor.

[Source] The National Interest/Dennis P. Halpin.March 9, 2015.

Dennis Halpin,
a former advisor on Asian issues to the House Foreign Affairs Committee, is currently a visiting scholar at the US-Korea Institute at SAIS (Johns Hopkins) and a consultant to the Poblete Analysis Group (PAG).